선출된 독재자

 

투표 完


과거 경제·안보·국방·사회 제반에 걸친 좌파 정권의 방향은 비록 견해는 달랐어도 충분히 예시가 가능했고, 또 우파적 독선에 사로잡힌 정치에서는 오히려 변화를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 정치 환경의 중화(中和)를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른 것 같다. ‘이재명’을 모르겠다’ ‘좌파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냐’는 등의 의문은 갈수록 강하게 남는다. 보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맥없이 무너지고 좌파는 정말 놀라운 속도와 농도로 이재명을 업고 나왔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주제의 책을 쓴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략) 사법부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혹은 선거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개선’하려고까지 한다. (중략) 선출된 독재자는 심판을 포획하고 정적을 매수하거나 무력화하고 게임의 법칙을 바꾼다. 그들의 시도는 언제나 점진적이고 합법적 방식이어서 나라의 민주주의가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선출된 독재자’-오늘날 민주 사회에서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그냥 독재자가 아니다. 바로 ‘선출된’ 독재자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즉 선출을 정당화 수단으로 삼은 독선적 정치인이다. 전 세계에 걸쳐 우리는 민주주의의 퇴색을 경험하고 있다. 민생의 어려움과 안보적 위협 속에서 자국민(自國民)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법과 규칙과 제도를 넘어서는 탈권 정치, 강압 정치를 정당화하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되살아나고 있다. 거기다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매가(MAGA)주의는 바로 이런 경향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이재명씨가 트럼프의 폐쇄적 자국 이기주의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듯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선출된 독재자’의 또 다른 문제점은 독재자를 선출한 국민의 무책임성이다. 민주제하에서 지도자와 의회를 선출하는 것은 유권자, 즉 국민이다. 그러면 국민이 누구를 뽑든 정당화되는 것인가? 선택자로서 국민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국민이 뽑은 사람이 독재자든 무능력자든 숨겨둔 전과가 있는 범죄자든 국민은 책임이 없는 것인가? 국민은 당장 눈에 보이는 비상계엄의 헛발질이나 내란의 반헌법성에는 민감하면서 선출된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란에는 둔감한 것인가?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