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비가 부슬부슬 흩뿌려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제주는 5년만이었다. 제주는 비행기만 타면 1시간만에 날아가는 곳이 되었지만 늘 그리워하면서도 한번 마음먹기가 참 힘들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중간에 코로나19가 끼어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제주행 비행기는 경비를 아끼려고 저가항공으로 티켓팅을 했는데 이번에는 유독 기내가 좁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비까지 와서 기류가 불안정해 기체가 많이 흔들리는 바람에 멀미를 지독스럽게 했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을 잃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즈음 지금 제주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첫날은 오후 비행기였기 때문에 예정된 일정은 따로 없었고 저녁을 먹고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다음날 렌터카를 픽업하러 다시 제주공항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마침 제주공항 근처의 도두사수항 주변에 오션뷰로 괜찮은 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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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무기력함 정지. 부정적인 생각 정지. S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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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제주 도두사수항 |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태풍이 올 것처럼 비바람이 불어서 어디든 안으로 빨리 들어가야 했다. 숙소 앞에 고등어쌈밥집이 있어 얼른 들어갔는데 뜻밖의 맛집이었다. 주문한 갈치조림은 재료 손질된 모습에서 내공이 느껴지고 비린내 하나없이 아주 맛있었다. 오션뷰와 맛있는 갈치조림이라니 이런 호화스러울 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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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등어쌈밥의 갈치조림 |
예전에는 비가 오면 불편하고 사진도 잘 안나올테니 망했다고 생각했을텐데 이번에는 제주에 비예보가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기대가 되었다. 비 오는 제주도 제주의 모습 중 하나이니까 짧은 기간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도두사수항은 일몰 명소로도 유명한데 노을은 비오는 날 유난히 더 붉다. 두꺼운 비구름 틈새로 비치는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푸른색 녹색... 오묘한 빛의 도두사수항 노을은 마치 내가 제주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제주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우산을 쓰고서도 비가 가로로(?) 내려서 다 맞아버렸지만 제주가 내게 천천히 스며들어 이내 가슴 속이 행복감으로 차올랐다. '나 지금 제주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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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명소인 도두사수항 |
숙소에 돌아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는데 아침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렌터카를 찾아온 후 아점으로 고기국수를 먹었다. 창 밖으로 키 큰 야자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제주에 온 것이 다시 한번 실감이 난다. 돼지 사골을 푹 고아내어 베지근한 맛(고기 따위를 끓인 국물이 맵지않고 담백하면서 기름지고 묵직하며 깊은 맛이 난다는 뜻의 제주 사투리)이 난다는 고기국수는 제주에 가면 꼭 먹어봄직한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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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별미인 베지근한 맛이 나는 고기국수 |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용연과 용두암은 조선시대 때 지방관리나 유배된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이다. 용연은 영주(제주의 옛이름) 12경 중 하나인 용연야범(龍淵夜泛)으로 유명하다. 용연야범이란 여름철 달밤에 용연에서 뱃놀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8월마다 한밤에 용연야범 축제가 열리고, 용연을 가로지르는 용연구름다리는 밤이면 불이 켜지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워 야간명소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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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길이 16m로 협곡 사이를 흐르는 작은 하구인 용연 |
나는 낮에 방문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조선시대 사람으로 빙의하여 야경을 상상해보았다. 주변의 건물이 다 사라지고 제주 밤바다가 수평선 끝까지 펼쳐져 일렁이고 협곡 사이로 흐르는 용연의 계곡수가 달빛에 윤슬을 반짝였을 것을 떠올려보니 용연야범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용두암은 용연의 서쪽 바닷가에 있어 좀 더 걸어야 한다. 가는 길목은 육지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이름모를 꽃들로 가꾸어져 있었다. 꽃구경을 하며 천천히 걷는 길이 즐겁다.
제주공항의 북동쪽 해안에 있는 용두암은 공항과 가장 가까운 관광지이다. 공항이 가까워서 낮게 뜬 비행기가 크게 보인다.
용두암은 이름 그대로 용머리를 닮은 바위를 뜻한다. 점성이 높은 용암이 위로 뿜어 올라가면서 굳은 후에 파도에 깍이면서 만들어진 기암이다. 그 모습이 바다 속 용궁에서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하려다 굳어진 모습과 같다고 해서 용두암이라고 부르는데, 붉은 색과 검은 빛의 현무암으로 되어있어 흑룡을 상징한다. 흑룡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행운이 깃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두암은 서쪽으로 100미터쯤 더 간 곳에서 바라봐야 형상이 잘 보이고 파도가 치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나는 오른쪽에 서서 용의 뒤통수에서 얼굴을 찾으려고 했다. 어쩐지 암만 봐도 용머리 같지는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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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7호인 용두암 |
용두암이 있는 해변을 따라 용두암해변 도로카페촌이 형성되어 있다. 가까운 스타벅스에 들려 카페인 수혈을 하기로 했다. 제주 스타벅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가 많았다. 백련초 치즈크림과 아몬드로 만든 현무암이 토핑되어 있는 케잌을 주문해서 커피와 먹었다.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좋다. 제주에서는 그냥 바다멍만 해도 매 순간이 충만했다.